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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과학(Sensory Science)/시각

색맹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까?― 색을 다르게 본다는 건, 세상을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

by lotus-white-sa 2025. 5. 15.

1. 서론: 색을 보는 방식은 모두 같지 않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빨강’, ‘파랑’, ‘초록’이라는 색은 실제로 개인마다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특히 ‘색맹(color blindness)’이라고 불리는 시각적 특성을 가진 사람들은 색상의 구분이나 인식 방식 자체가 일반적인 시각과 다르다.
색맹은 병이나 결함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감각 경험이다. 우리는 같은 사과를 보면서 누군가는 ‘빨간 사과’라고 인식하지만, 색맹을 가진 사람은 사과의 색조를 회갈색, 녹갈색처럼 다르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세상을 흐릿하게 본다거나, 전혀 색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색맹은 형태, 명암, 텍스처 등의 요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색을 대신할 다른 단서들로 세상을 해석한다.

이 글에서는 색맹의 시각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색맹의 유형과 그에 따른 인식 차이, 그리고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과학적으로, 그리고 공감적으로 살펴본다.

색맹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까?― 색을 다르게 본다는 건, 세상을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

2. 색맹은 왜 생기는가? – 눈의 구조와 뇌의 해석

색을 인식하는 능력은 눈의 망막에 있는 원추세포(cone cells) 덕분이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빨강(R), 초록(G), 파랑(B) 세 가지 종류의 원추세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세 가지가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을 감지해 뇌가 색으로 ‘해석’하는 방식이 바로 삼원색 시각(trichromatic vision)이다. 그러나 색맹은 이 원추세포 중 하나 이상이 기능이 없거나, 민감도가 변형된 경우다.
대표적인 색맹 유형은 다음과 같다:

  • 적록색맹(Red-Green Color Blindness): 가장 흔하며, 빨강과 초록을 구분하기 어려움
    • 제1색맹 (Protanopia): 빨간 원추세포 기능 결핍
    • 제2색맹 (Deuteranopia): 초록 원추세포 기능 결핍
  • 청색맹(Blue-Yellow Color Blindness): 파랑과 노랑을 혼동 (드물다)
  • 전색맹(Achromatopsia): 매우 드문 경우로, 색 자체를 거의 인식하지 못함 (흑백 시각에 가까움)

이처럼 색맹은 특정 색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색 사이의 구분이 비정상적으로 좁거나 왜곡되는 시각 구조다. 뇌는 들어오는 시각 정보를 바탕으로 색을 해석하지만, 정보 자체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색의 인식 결과도 달라진다.

3. 색맹은 어떻게 세상을 인식할까? – 다르게 보지만, 다르게 이해하지는 않는다

색맹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흐리게’ 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선명하고 구체적인 형태, 명암, 움직임 등을 잘 인식하며,
색의 이름과 사용 방식에 익숙한 경우 대부분의 상황에서 큰 불편 없이 생활한다. 심지어 일부 색맹은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 작업도 훌륭히 해낸다. 하지만 문제는 특정 색상의 구분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빨강과 초록의 구분이 어려운 사람은 신호등, 지도, 색깔로 구분된 통계 그래프 등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할 수 있다. 또한 자연 속에서 빨간 꽃과 녹색 잎의 구분이 불분명해 꽃을 잘 찾지 못하거나, 과일이 익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색맹은 세상을 보는 ‘방법’을 달리 훈련하며, 색 대신 형태, 위치, 텍스트, 명암, 질감 등 다른 단서를 이용해 상황을 해석하는 데 능숙하다. 이는 뇌가 감각 결핍을 보완하려는 적응 능력을 가진 덕분이며, ‘정상 시각’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4. 색맹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회 – 시각적 다양성에 대한 감각

색맹을 가진 사람들은 전 세계 인구의 약 8% 이상(남성 기준)을 차지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디자인, 교육, 기술 영역에서는 ‘정상 시각’을 전제한 시각 정보만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 노선도나 통계 차트에서 색상만으로 정보 구분을 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빨강–초록–노랑으로 구성된 안내 표시를 사용할 경우 색맹 사용자에게는 정보 접근성이 낮아질 수 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색맹을 고려한 색상 대체 전략(colorblind-friendly design)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 명암 대비를 강화하고, 색상이 아니라 패턴이나 아이콘을 함께 사용
  • 색맹 시뮬레이션 도구를 활용해, 디자인 단계에서 시각적 접근성을 검토
  • 웹사이트나 인쇄물에 ‘색만으로 구분하지 말 것’을 디자인 원칙으로 반영

또한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색맹 보정 안경이나 색 변환 앱, AR 필터 등을 통해 색맹 사용자도 색 정보를 보다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색맹은 장애가 아니라, 감각 경험에서 하나의 변이다. 이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은 더 풍부하고 열린 감각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5. 색을 다르게 본다는 것, 세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

색맹은 단순히 특정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제한’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들에게는 ‘빨강’이나 ‘초록’이 우리가 보는 그것과 다를 수 있지만, 그 색도 그들만의 고유한 ‘느낌과 분위기’를 담고 있다.
이처럼 색의 인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임을 색맹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실제로 색맹을 가진 예술가, 사진작가, 디자이너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시각적 감각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발전시켜 왔다. 그들은 색보다는 형태, 명암, 질감, 구성, 선의 흐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감각을 통해 ‘색의 부재’를 보완하거나 전혀 새로운 미감을 창조해 낸다.

이는 감각이 결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감각이 강화되고, 감각의 해석 방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마치 청각 장애인이 진동을 통해 음악을 느끼고, 시각 장애인이 촉각으로 그림을 상상하듯, 색맹도 자신만의 감각 지도로 세상을 살아가며, 그 세상은 결코 ‘결핍된’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보이는 색’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감각의 다양성과 인간 경험의 폭넓음을 놓치게 된다. 색맹은 그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과를 보지만, 그 색을 다르게 보며,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기억하고 살아간다. 그 다양성이야말로, 인간 감각의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