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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과학(Sensory Science)/청각

뇌는 왜 특정 멜로디를 반복 재생할까?

by lotus-white-sa 2025. 5. 2.

1. 아무 이유 없이 멜로디가 맴도는 경험, 왜 자꾸 재생될까?

가끔은 어떤 노래의 한 부분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때가 있다. 심지어 그 노래를 듣지 않은 지 오래됐는데도, 특정한 순간에 문득 떠오르고는 한다. 이처럼 특정 멜로디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반복적으로 뇌 안에서 재생되는 현상을 우리는 흔히 경험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를 단순히 '귀에 감긴 노래' 정도로 여기지만, 사실 이 현상은 뇌가 정보와 감정을 다루는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현상은 심리학적으로는 귀벌레(Earworm)라고 불리며, 학술적으로는 불수의적 음악 이미지(Involuntary Musical Imagery, INMI)’라는 이름으로 연구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는 전 세계적으로 약 90% 이상의 사람이 경험한 바 있는 보편적인 인지 현상이며, 어떤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멜로디 재생을 경험하기도 한다.

귀벌레는 단순한 중독 현상이나 음악적 습관으로 보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특징이 많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감정 상태에서 자주 귀벌레를 경험하며, 그 멜로디는 전곡 전체가 아닌 짧은 구절, 특히 후렴이나 반복이 강한 부분에서 잘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특성은 뇌가 특정 자극을 반복적으로 되새김질하는 독특한 정보 처리 방식을 보여준다.

뇌는 왜 특정 멜로디를 반복 재생할까?

2. 귀벌레 현상은 어떻게 뇌에서 발생하는가?

이 현상이 발생하는 생리학적 기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뇌의 어떤 부위가 이 과정에 관여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과학자들은 뇌 영상 장비를 통해 귀벌레 현상이 나타날 때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을 발견했다. 주요 부위는 청각 피질(auditory cortex),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 그리고 해마(hippocampus)다.

청각 피질은 우리가 외부 소리를 인지할 때 작동하는 뇌 영역이지만, 놀랍게도 귀벌레 현상이 있을 때도 마치 실제로 음악을 듣는 것처럼 활성화된다. 즉, 뇌는 음악이 실제로 들리지 않아도, 기억된 멜로디를 재생하며 동일한 반응을 일으킨다. 또한 전전두엽은 집중력과 억제력을 담당하는 부위인데, 이 부분이 비교적 이완된 상태일 때 귀벌레가 더 쉽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딱히 집중하고 있지 않거나 뇌가 '빈 상태'에 가까운 순간, 과거에 들었던 음악이 자동으로 떠오르며 뇌 속을 맴도는 현상이 유발되는 것이다.

해마는 기억을 저장하고 불러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음악과 감정은 해마에서 함께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특정한 장소에서 들은 음악이 그 장소와 함께 기억되거나, 슬픈 감정이 있었던 순간의 배경 음악이 감정과 결합된 형태로 뇌에 저장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복합 기억은 향후 유사한 감정 상태나 환경이 형성될 때 자동으로 재생되며 귀벌레 현상을 유도할 수 있다.

3. 왜 어떤 멜로디는 더 잘 맴돌까? – 귀에 붙는 음악의 조건

우리가 듣는 모든 음악이 귀벌레로 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멜로디에는 일정한 특징과 패턴이 존재한다. 이러한 특징은 음악 자체의 구조뿐만 아니라, 청자의 감정 상태, 인지적 습관과도 관련되어 있다.

첫 번째로, 멜로디가 간결하고 반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을 때 귀벌레 현상이 잘 발생한다. 특히 대중가요의 후렴구처럼 몇 마디의 음이 반복되거나, 리듬이 단순한 구성이 이어질 때 뇌는 그 멜로디를 기억하기 쉽고, 그만큼 반복 재생될 가능성도 커진다.

두 번째로, 귀벌레로 잘 남는 음악은 일반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구조 안에 약간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완전히 단조롭지 않고, 뇌가 다음 음을 추측하게 만들면서 살짝 벗어나는 변주를 포함한 음악은 뇌의 주의를 끌고,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세 번째로, 감정적으로 강한 경험과 함께한 음악은 귀에 더 오래 남는다. 예를 들어, 실연을 했을 때 듣던 음악이나, 특별한 여행지에서 들었던 노래는 그 당시의 정서와 함께 뇌에 저장되며, 비슷한 감정 상태나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때 그 멜로디가 자동으로 떠오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음악이 끝까지 완결되지 않았을 때 귀벌레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음악을 중간에 끄거나, 익숙한 노래가 갑자기 멈췄을 경우 뇌는 그 멜로디를 스스로 마무리 지으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반복을 시작한다. 이 현상은 폐쇄성의 법칙(closure)이라는 게슈탈트 심리학 개념과도 일맥상통하며, 뇌의 패턴 완성 본능이 발현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4. 뇌는 왜 이런 반복을 멈추지 못할까? – 인지적 루프의 작동 방식

귀벌레는 대개 무해한 현상이지만, 때로는 일상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특히 과도하게 반복될 경우 집중력 저하나 불쾌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뇌는 이런 반복을 스스로 멈추지 못할까? 이는 뇌가 특정한 정보에 종결 신호(closure signal)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종의 인지적 루프(cognitive loop)가 형성되어, 한 번 활성화된 멜로디 정보가 계속해서 회전하며, 다른 정보나 자극이 그 회로를 덮어쓰지 않는 한 스스로 꺼지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루프는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어렵고, 무의식적 정보 처리 시스템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귀벌레를 지워야겠다고 생각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연구에서는 껌을 씹거나 음성으로 무언가를 반복해서 말하는 행동이 귀벌레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뇌의 언어·청각 회로에 새로운 자극을 주며, 귀벌레 멜로디를 덮어쓰는 방식으로 효과를 발휘한다. 즉, 귀벌레를 없애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멜로디보다 더 강력한 청각 자극이나 주의 집중 대상을 뇌에 제공하는 것이다.

마무리하며: 귀에 맴도는 멜로디는 뇌의 창작이자 반복 훈련

‘왜 뇌는 특정 멜로디를 반복해서 재생할까?’라는 질문은 사실 우리의 뇌가 얼마나 감각, 기억, 감정을 긴밀히 연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단서이다. 귀벌레 현상은 뇌가 받은 자극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의미 있는 형태로 재정리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하나의 결과일 수 있다. 또한, 특정 음악이 감정과 연결되어 반복될 때, 우리는 그 음악을 단순히 ‘소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한 조각, 삶의 기억, 혹은 나만의 내면적 흐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는 것은 때때로 귀찮을 수 있지만, 그 반복은 우리가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뇌의 신호일 수도 있다. 음악은 들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고 되살아나며, 감각으로 다시 태어나는 감정의 재현인 셈이다.